2주차 | 12월 26일(화) 2교시 (16:30-18:20) 권태: 사전적 의미로 권태란 특별히 할 일이 없고 관심을 끄는 것도 없는 단조로운 상태의 지속을 가리킨다. 권태는 의미의 상실, 흥미의 소멸을 뜻한다. 의미의 상실과 권태의 관계에서 어느 것이 먼저인지 따지기는 어렵다. 권태롭기 때문에 의미가 상실되는 것인지, 아니면 의미가 상실되기 때문에 권태로운 것인지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권태와 의미상실은 동전의 양면이다. 권태와 의미 상실의 관계를 보여주는 다른 예는, 언제 권태가 발생하는지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권태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거나, 우리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해야 할 때 발생한다. 이렇게 우리가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 혹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권태는 발생한다. 권태는 시간과 관련이 있다. 대체로 시간은 변화를 동반하는데, 단조롭다는 말은 시간의 흐름이 끊긴다는 것을 의미하고, 따라서 권태란 마치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과 같은 상태, 따라서 삶이 단조롭고 아무런 변화도 보여주지 못하는 상태와 관련된다. 즉 공허하고 무의미한 시간이 지속되는 것이 권태다. 독일의 철학자 가다머는 이렇게 말한다. “시간이란 어차피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시간이 의미 없이 계속된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즉 의미 없이 머무는 시간, 그리고 이것이 너무 길게 느껴지고, 따라서 고통스러운 권태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있다.” 이렇게 시간은 의미 없는 시간의 흐름이 길게 느껴지는 것을 말하는데, 독일어로 권태를 Langeweile라고 표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lange는 ‘오랜’을 뜻하고 Weile는 ‘의미 없이 머무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권태로울 때 사람들은 시간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른다. 시간을 활용할 능력이나 의욕 자체가 소멸한 상태를 권태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시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다루어질 것이다. -권태란 무엇인가: 영화 <은교>와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 -근대와 권태: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 -예술에 표현된 권태: 이상의 산문 『권태』 -철학에서의 권태: 키에르케고르의 권태론 |
3주차 | 1월 2일(화) 2교시 (16:30-18:20) 웃음과 눈물: 웃음과 울음은 단순히 인간의 신체와 성대의 일부가 결합하여 내는 소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언어가 아닌 수단, 즉 비언어적 수단을 통해 인간이 표현하는 감정이고, 이런 점에서 의사소통방식의 일환이다. 인간은 특정한 상황에 처했을 때, 웃거나 울면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이를 통해 타인과 소통한다. 대체로 웃음과 울음은 기쁨이나 슬픔과 같은 일상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상황을 한계상황, 위기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간은 웃음과 울음이라는 감정 표현을 통해서 이를 극복하려고 한다. 이 시간에는 웃음과 울음이 예술에서 어떤 의미작용을 하는지, 고대의 비극과 희극에서 출발하여, 현대의 예술에 이르기까지 그 의미작용을 탐색한다. 이 시간에 다룰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인간학적 요소로서의 웃음과 눈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성경에서의 웃음(사라의 웃음) -철학적 웃음론: 홉스와 데카르트, 쇼펜하우어 그리고 니체의 웃음이론 -예술에 나타난 웃음과 울음 그리고 그 의미: 소설 『장미의 이름』,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 |
4주차 | 1월 9일(화) 2교시 (16:30-18:20) 언어와 침묵: 인간은 언어를 사용한다. 인간에게 언어란 사고, 감정, 규범, 가치, 대상 등을 전달하는 의사소통의 수단이다. 따라서 언어란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사회라는 공동체에서 일종의 약속으로 존재하며, 그 약속의 일환으로 의사소통을 위한 문법이 만들어진다. 즉 언어란 사회적 합의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다. 소쉬르 같은 언어학자들은 인간은 애초에 언어습득 능력을 부여받고 태어난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언어란 인간의 두뇌에 주어져 있는 초개인적인 기호의 체계다. 인간은 언어를 습득하고 사용할 능력을 이미 갖추고 태어나지만, 사회와 접촉을 통해서 성장하는 과정에서 개발된다.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에게서 이러한 능력은 찾아볼 수 없다. 그 어떤 동물도 사회적 약속 체계로서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증거가 아직은 없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언어란 인간에게만 주어진다. 타인과 의사소통을 위해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는데, 이때 언어의 반대는 침묵이다. 인간은 말하는 동안에는 침묵하지 않고, 또 침묵하는 동안에는 말하지 않는다. 말을 한다면 의사소통을 한다는 뜻이고, 반대로 침묵한다는 말은 말문을 닫는 것인데, 이것은 의사소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겉으로 보았을 때의 관점이다. 실제로 침묵은 강력한 의사소통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묵비권이나 침묵시위를 생각해 보자. 우리 법은 묵비권을 인정한다. 자신에게 불리한 질문에 대해 침묵을 통해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다. 심문이나 질문에 항의하기도 한다. 침묵시위도 마찬가지다. 특별한 요구나 주장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침묵을 통해서 더 강력한 항의를 표시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시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다루어질 것이다. -보편논쟁: 유명론과 실재론의 대립 -말과 사물의 관계: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이미지의 배반> -언어와 침묵을 바라보는 철학적 관점: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 -언어로서의 침묵: 세익스피어의 『리어 왕』 |
5주차 | 1월 16일(화) 2교시 (16:30-18:20) 숭고와 성스러움: 낭만주의가 절정을 이룬 1800년 무렵 유럽의 예술에서는 무너진 성채, 위압적일 정도로 우뚝 솟은 산봉우리, 가파른 협곡, 낭떠러지 해변, 거대한 산맥과 같은 장면 묘사가 자주 등장한다. 좋은 예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1774-1840)의 그림에 자주 나오는데, 구름 낀 산, 폭풍우 몰아치는 바다, 쏟아붓듯이 흘러내리는 폭포, 이런 위압적인 자연이 낭만주의 소설의 풍경묘사뿐만 아니라 프리드리히의 회화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자연은 “절대적으로 위대한 것”, “비할 나위 없이 위대한 것”이고 또 이러한 자연은 “두려움의 대상으로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칸트가 말하는 [미의 범주가 아닌] “숭고 das Erhabene, the sublime”의 범주에 들 수 있다. 거의 이 시기에 칸트가 펴낸 철학서 판단력 비판에 따르면, 이러한 “숭고한” 자연 현상[사물]은 늘 상상력과 이성의 관계로 파악된다. 미적 대상과는 달리, 이러한 숭고한 자연의 대상은 절대적으로 위압적이고 격정적인 부조화와 불균형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일단 관찰 주체에게는 “불쾌감 Unlust”으로 나타나지만, 지적인 힘 내지는 이성적 능력을 소유한 인간에게는 감각적인 인상을 넘어설 수 있는(erhebend) 초감각적, 도덕적 능력을 부여하기 때문에 “쾌감 Lust”을 심어준다. “숭고”의 미학은 그러니까 자율적인 주체가 자연의 지배자로 일어설 수 있는 거점이 되는 셈인데, 주체가 자연으로 도피하여 그곳에서 승리감을 만끽했던 시민사회의 일반적인 정신사적 흐름이 여기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예술과 삶, 곧 미와 장엄함의 범주를 아우르고자 했던 낭만주의 시대에 더욱 분명해진다. 오늘날에는 흔히 종교적 감정과 결합되어 있는 ‘성스럽다 holy’라는 영어 형용사의 어원은 본래 ‘완전함’을 뜻하는 whole이다. 신은 완전하나 인간은 불완전하니, 성스러움은 신적 영역이고, 종교적 감정이다. 루마니아 태생의 종교학자 엘리아데의 주장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몸은 속(俗)에 거주하나 영혼은 늘 성(聖)을 추구하니, 성과 속의 변증법적 관계는 인간의 근본적인 조건이기도 하다. 인간이 성스러움에 관한 개념을 최초로 얻은 시기는 기독교가 보급된 중세보다 훨씬 거슬러 올라간다. 이미 고대 희랍에서도 인간은 신의 속성인 성스러움을 느꼈을 것으로 추측된다. 희랍어에 ‘누멘 Numen’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것은 ‘신성(神性)의 작용’을 뜻했다. 떡갈나무 잎사귀나 별들의 위치에서 신의 뜻을 읽을 수 있었던 배경이 여기에 있다. 인간이 알 수 없는 신적인 영역을 이미 고대인들은 예언자를 통해서 알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범신론이 보편적 문화였던 당시에 자연은 성스러움을 체험하는 장이 되어주었다. 현상학에서 출발하여 종교의 심리 작용을 탐구한 루돌프 오토는 ‘성스러움’을 ‘누멘적인 것 das Numinöse’으로 불렀다. 그에 따르면 성스러움이란 논리나 이성이 아니라, 느낌과 내면의 각성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 우리가 신을 이성을 통해서 접근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은 느낌과 내면의 각성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신성은 이성이 아니라 영적인 영역인지도 모릅니다. 성스러움은 현실을 초월한 영역에 관한 감각적 심리적 체험이기 때문이다. 자연신과 결별하고 기독교가 보편화된 중세에 성스러움은 구원이라는 의미를 추가로 얻게 된다. 원래 성스러움은 인간이 느끼는 신성, 신의 존재에 대한 감정적 반응이었는데, 이것이 중세에 들어와서, 구원이라는 의미를 추가로 얻게 된 것이다. 그 강력한 언어 사용의 증거가 독일어에서 발견된다. 중세 문화의 토대를 제공한 게르만족의 언어에서 ‘성스럽다’라는 단어가 두루 쓰이기 시작한 것은 8세기인데, 이 시기에 ‘성스러움 das Heilige’이라는 단어는 ‘구원 Heil’이라는 의미와 결합된다. 중세처럼 종교가 인간의 삶의 중심에 들어왔던 시대에 인간은 ‘성스러움’의 체험을 통해 초월적인 영역을 느끼고 구원을 예감할 수 있었고, 이 과정에서 중세의 강력한 정신적인 공동체가 굳어졌다. 프랑스의 종교학자 뒤르켐이 “성스러움은 사회다”라는 테제를 내세우며 종교가 공동체의 유지를 위한 보편적 규범을 제공한다고 본 맥락도 여기에 있다. 성스러움이 단순히 신성에 대한 체험, 감정에 그치지 않고, 이를 통해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믿음을 갖게 되면서, 사회적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종교생활의 기본형태, 1915년) 인간이 성스러움의 체험을 통해서 사회적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범신론이건 기독교이건 인간은 성스러움을 추구하며 이 과정에서 자신을 떠나, 타인과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자신을 강력하게 느끼는 사회가 근대인데(개인의 탄생, 르네상스), 그 이전인 중세에는 개인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고, 대신에 개인을 떠나서 공동체 속의 존재로만 인식했다. 이 배경에 기독교라는 종교가 있었고,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성스러움의 체험과 구원의 관계가 여기에 있음. 이처럼 개인을 초월하여 더 큰 공동체 속의 일원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을 엑스타시라고 하는데, 종교적 체험으로서의 ‘성스러움’과 오늘날 다소 부정적인 느낌과 혼용되는 ‘엑스타시 ecstasy’, 즉 마약을 복용한 후에 흥분된 상태에서 도달하는 자아 초월의 상태의 의미적 기원도 여기에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시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다루어질 것이다. -숭고란 무엇인가: 칸트의 『판단력 비판』, 리오타르의 아방가르드 예술론, 하이데거 철학 -숭고와 예술: 화가 프리드리히의 그림, 낭만주의 문학, 아방가르드 예술 -숭고와 정치: 히틀러의 전체주의적인 선동 정치 -성스러움이란 무엇인가: 성스러움의 개념의 생성과 전개 -성스러움과 예술: 바넷 뉴먼의 그림 <불의 음성> |
6주차 | 1월 23일(화) 2교시 (16:30-18:20) 문명과 몸: 문명은 인간이 뭔가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세계, 즉 꾸며 놓은 세계를 말한다. 문화 혹은 문명을 뜻하는 영어 ‘culture’의 뜻은 ‘가공, 농경’인데, 여기에서 문명은 인간이 직접 만들어 낸 어떤 것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문명의 반대는 ‘자연’이다. 문명의 기원은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인간이 자연적인 삶을 버리고 문명의 삶을 시작한 것은 불을 사용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서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신화 속 인물 프로메테우스는 그 태초의 영웅이다. 그러나 역사학에서 문명, 문화를 이야기할 때에는 대체로 근대사회, 특히 계몽주의가 탄생했던 1750년 무렵을 가리킨다. 실제로 ‘culture’라는 단어가 사용된 시기도 17세기 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명이라는 단어가 근대와 근대 이전을 나누는 기준이 될 수 있는데, 이 두 시기는 너무나 확연한 차이가 있다. 근대를 뜻하는 ‘modern times’라는 단어는 ‘새로운 시대’를 뜻하고, 이 단어가 유럽인들에게 폭넓게 사용되는 시점은 대체로 18세기였다. 독일의 역사학자 코젤렉에 따르면, 근대의 기점은 18세기에서 찾을 수 있다. 유럽인들이 근대를 뜻하는 단어에 ‘modern’을 붙인 것은, 18세기를 전후하여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보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은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본 것인데, 그렇다면 새로움의 근거는 무엇일까? 새로움은 1800년을 전후하여 유럽에 불어닥친 혁명이었다. 근대는 사회 각 영역이 급진적인 변혁을 이루는 시기였다. 정치에서는 프랑스혁명(1789)이, 경제에서는 산업혁명(18세기 후반)이, 철학의 경우에는 데카르트에서 칸트로 이어지는 인식론의 혁명이 있었다. 특히 칸트의 『순수이성비판』(1787)은 근대적 인식론의 출발을 알린다. 세상은 인간의 시각에 의해 판단되고 인식된다는 주장은 근대 이전의 인식론과 완전히 다른 틀이었다. 이것을 철학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부르는데, 칸트가 인식과 관련하여 “우리의 경험은 우리의 인식능력의 형식에 의해 결정된다.”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시간에는 문명에 관한 위와 같은 관점에서, 문명의 시대에 인간의 몸이 어떻게 간주되는지의 문제를 중심으로 크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다룰 것이다. -문명화의 의미: 루소의 『인간 불평등의 기원』 -영화에 나타난 문명화와 몸: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 -68운동과 몸: 유럽에서 벌어진 1968년도의 저항 운동 -예술에 나타난 문명과 몸: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강좌 정보
학력: 서울대 졸업(1984), 서울대 독문과 대학원 박사(1993)
현직: 성신여대 독문과 교수
교재(참고용): 김길웅(저): 『문화적 인간학』(2016, 아카넷 출판사)
별도로 구입할 필요는 없음.
강의 계획
12월 19일(화) 2교시 (16:30-18:20)
멜랑콜리아: 멜랑콜리아는 고대에는 “신이 내린 광기”라고 이해되기도 했고, 또 천재의 중요한 속성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20세기 초에는 의욕을 잃고 활기를 잃은 질병으로 인식되어 현재에는 우울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된다. 푸코의 담론이라는 개념이 보여주듯이, 담론으로서의 멜랑콜리아도 역사에 따라 늘 다르게 이해되어 왔다. 이 시간에는 역사적으로 멜랑콜리아라는 담론이 어떤 의미로 생성되어 발전되어 현재에 이르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이를 위해서 각각의 시대별로 대표적인 회화와 문학 작품 그리고 철학적 사유를 검토할 것이다. 이 시간에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다루어질 것이다.
-멜랑콜리아란 무엇인가: 멜랑콜리아라는 담론의 의미와 형성과정
-사투르누스와 멜랑콜리아: 시간의 신 사투르누스의 도상 분석
-뒤러의 멜랑콜리아: 뒤러의 그림 <멜랑콜리아 1> 분석
-근대에서의 멜랑콜리아: 모더니즘 문학에서의 바라본 멜랑콜리아
12월 26일(화) 2교시 (16:30-18:20)
권태: 사전적 의미로 권태란 특별히 할 일이 없고 관심을 끄는 것도 없는 단조로운 상태의 지속을 가리킨다. 권태는 의미의 상실, 흥미의 소멸을 뜻한다. 의미의 상실과 권태의 관계에서 어느 것이 먼저인지 따지기는 어렵다. 권태롭기 때문에 의미가 상실되는 것인지, 아니면 의미가 상실되기 때문에 권태로운 것인지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권태와 의미상실은 동전의 양면이다. 권태와 의미 상실의 관계를 보여주는 다른 예는, 언제 권태가 발생하는지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권태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거나, 우리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해야 할 때 발생한다. 이렇게 우리가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 혹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권태는 발생한다. 권태는 시간과 관련이 있다. 대체로 시간은 변화를 동반하는데, 단조롭다는 말은 시간의 흐름이 끊긴다는 것을 의미하고, 따라서 권태란 마치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과 같은 상태, 따라서 삶이 단조롭고 아무런 변화도 보여주지 못하는 상태와 관련된다. 즉 공허하고 무의미한 시간이 지속되는 것이 권태다. 독일의 철학자 가다머는 이렇게 말한다. “시간이란 어차피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시간이 의미 없이 계속된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즉 의미 없이 머무는 시간, 그리고 이것이 너무 길게 느껴지고, 따라서 고통스러운 권태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있다.” 이렇게 시간은 의미 없는 시간의 흐름이 길게 느껴지는 것을 말하는데, 독일어로 권태를 Langeweile라고 표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lange는 ‘오랜’을 뜻하고 Weile는 ‘의미 없이 머무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권태로울 때 사람들은 시간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른다. 시간을 활용할 능력이나 의욕 자체가 소멸한 상태를 권태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시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다루어질 것이다.
-권태란 무엇인가: 영화 <은교>와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
-근대와 권태: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
-예술에 표현된 권태: 이상의 산문 『권태』
-철학에서의 권태: 키에르케고르의 권태론
1월 2일(화) 2교시 (16:30-18:20)
웃음과 눈물: 웃음과 울음은 단순히 인간의 신체와 성대의 일부가 결합하여 내는 소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언어가 아닌 수단, 즉 비언어적 수단을 통해 인간이 표현하는 감정이고, 이런 점에서 의사소통방식의 일환이다. 인간은 특정한 상황에 처했을 때, 웃거나 울면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이를 통해 타인과 소통한다. 대체로 웃음과 울음은 기쁨이나 슬픔과 같은 일상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상황을 한계상황, 위기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간은 웃음과 울음이라는 감정 표현을 통해서 이를 극복하려고 한다. 이 시간에는 웃음과 울음이 예술에서 어떤 의미작용을 하는지, 고대의 비극과 희극에서 출발하여, 현대의 예술에 이르기까지 그 의미작용을 탐색한다. 이 시간에 다룰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인간학적 요소로서의 웃음과 눈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성경에서의 웃음(사라의 웃음)
-철학적 웃음론: 홉스와 데카르트, 쇼펜하우어 그리고 니체의 웃음이론
-예술에 나타난 웃음과 울음 그리고 그 의미: 소설 『장미의 이름』,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
1월 9일(화) 2교시 (16:30-18:20)
언어와 침묵: 인간은 언어를 사용한다. 인간에게 언어란 사고, 감정, 규범, 가치, 대상 등을 전달하는 의사소통의 수단이다. 따라서 언어란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사회라는 공동체에서 일종의 약속으로 존재하며, 그 약속의 일환으로 의사소통을 위한 문법이 만들어진다. 즉 언어란 사회적 합의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다. 소쉬르 같은 언어학자들은 인간은 애초에 언어습득 능력을 부여받고 태어난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언어란 인간의 두뇌에 주어져 있는 초개인적인 기호의 체계다. 인간은 언어를 습득하고 사용할 능력을 이미 갖추고 태어나지만, 사회와 접촉을 통해서 성장하는 과정에서 개발된다.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에게서 이러한 능력은 찾아볼 수 없다. 그 어떤 동물도 사회적 약속 체계로서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증거가 아직은 없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언어란 인간에게만 주어진다. 타인과 의사소통을 위해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는데, 이때 언어의 반대는 침묵이다. 인간은 말하는 동안에는 침묵하지 않고, 또 침묵하는 동안에는 말하지 않는다. 말을 한다면 의사소통을 한다는 뜻이고, 반대로 침묵한다는 말은 말문을 닫는 것인데, 이것은 의사소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겉으로 보았을 때의 관점이다. 실제로 침묵은 강력한 의사소통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묵비권이나 침묵시위를 생각해 보자. 우리 법은 묵비권을 인정한다. 자신에게 불리한 질문에 대해 침묵을 통해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다. 심문이나 질문에 항의하기도 한다. 침묵시위도 마찬가지다. 특별한 요구나 주장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침묵을 통해서 더 강력한 항의를 표시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시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다루어질 것이다.
-보편논쟁: 유명론과 실재론의 대립
-말과 사물의 관계: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이미지의 배반>
-언어와 침묵을 바라보는 철학적 관점: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
-언어로서의 침묵: 세익스피어의 『리어 왕』
1월 16일(화) 2교시 (16:30-18:20)
숭고와 성스러움: 낭만주의가 절정을 이룬 1800년 무렵 유럽의 예술에서는 무너진 성채, 위압적일 정도로 우뚝 솟은 산봉우리, 가파른 협곡, 낭떠러지 해변, 거대한 산맥과 같은 장면 묘사가 자주 등장한다. 좋은 예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1774-1840)의 그림에 자주 나오는데, 구름 낀 산, 폭풍우 몰아치는 바다, 쏟아붓듯이 흘러내리는 폭포, 이런 위압적인 자연이 낭만주의 소설의 풍경묘사뿐만 아니라 프리드리히의 회화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자연은 “절대적으로 위대한 것”, “비할 나위 없이 위대한 것”이고 또 이러한 자연은 “두려움의 대상으로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칸트가 말하는 [미의 범주가 아닌] “숭고 das Erhabene, the sublime”의 범주에 들 수 있다. 거의 이 시기에 칸트가 펴낸 철학서 판단력 비판에 따르면, 이러한 “숭고한” 자연 현상[사물]은 늘 상상력과 이성의 관계로 파악된다. 미적 대상과는 달리, 이러한 숭고한 자연의 대상은 절대적으로 위압적이고 격정적인 부조화와 불균형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일단 관찰 주체에게는 “불쾌감 Unlust”으로 나타나지만, 지적인 힘 내지는 이성적 능력을 소유한 인간에게는 감각적인 인상을 넘어설 수 있는(erhebend) 초감각적, 도덕적 능력을 부여하기 때문에 “쾌감 Lust”을 심어준다. “숭고”의 미학은 그러니까 자율적인 주체가 자연의 지배자로 일어설 수 있는 거점이 되는 셈인데, 주체가 자연으로 도피하여 그곳에서 승리감을 만끽했던 시민사회의 일반적인 정신사적 흐름이 여기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예술과 삶, 곧 미와 장엄함의 범주를 아우르고자 했던 낭만주의 시대에 더욱 분명해진다.
오늘날에는 흔히 종교적 감정과 결합되어 있는 ‘성스럽다 holy’라는 영어 형용사의 어원은 본래 ‘완전함’을 뜻하는 whole이다. 신은 완전하나 인간은 불완전하니, 성스러움은 신적 영역이고, 종교적 감정이다. 루마니아 태생의 종교학자 엘리아데의 주장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몸은 속(俗)에 거주하나 영혼은 늘 성(聖)을 추구하니, 성과 속의 변증법적 관계는 인간의 근본적인 조건이기도 하다. 인간이 성스러움에 관한 개념을 최초로 얻은 시기는 기독교가 보급된 중세보다 훨씬 거슬러 올라간다. 이미 고대 희랍에서도 인간은 신의 속성인 성스러움을 느꼈을 것으로 추측된다. 희랍어에 ‘누멘 Numen’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것은 ‘신성(神性)의 작용’을 뜻했다. 떡갈나무 잎사귀나 별들의 위치에서 신의 뜻을 읽을 수 있었던 배경이 여기에 있다. 인간이 알 수 없는 신적인 영역을 이미 고대인들은 예언자를 통해서 알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범신론이 보편적 문화였던 당시에 자연은 성스러움을 체험하는 장이 되어주었다. 현상학에서 출발하여 종교의 심리 작용을 탐구한 루돌프 오토는 ‘성스러움’을 ‘누멘적인 것 das Numinöse’으로 불렀다. 그에 따르면 성스러움이란 논리나 이성이 아니라, 느낌과 내면의 각성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 우리가 신을 이성을 통해서 접근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은 느낌과 내면의 각성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신성은 이성이 아니라 영적인 영역인지도 모릅니다. 성스러움은 현실을 초월한 영역에 관한 감각적 심리적 체험이기 때문이다. 자연신과 결별하고 기독교가 보편화된 중세에 성스러움은 구원이라는 의미를 추가로 얻게 된다. 원래 성스러움은 인간이 느끼는 신성, 신의 존재에 대한 감정적 반응이었는데, 이것이 중세에 들어와서, 구원이라는 의미를 추가로 얻게 된 것이다. 그 강력한 언어 사용의 증거가 독일어에서 발견된다. 중세 문화의 토대를 제공한 게르만족의 언어에서 ‘성스럽다’라는 단어가 두루 쓰이기 시작한 것은 8세기인데, 이 시기에 ‘성스러움 das Heilige’이라는 단어는 ‘구원 Heil’이라는 의미와 결합된다. 중세처럼 종교가 인간의 삶의 중심에 들어왔던 시대에 인간은 ‘성스러움’의 체험을 통해 초월적인 영역을 느끼고 구원을 예감할 수 있었고, 이 과정에서 중세의 강력한 정신적인 공동체가 굳어졌다. 프랑스의 종교학자 뒤르켐이 “성스러움은 사회다”라는 테제를 내세우며 종교가 공동체의 유지를 위한 보편적 규범을 제공한다고 본 맥락도 여기에 있다. 성스러움이 단순히 신성에 대한 체험, 감정에 그치지 않고, 이를 통해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믿음을 갖게 되면서, 사회적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종교생활의 기본형태, 1915년) 인간이 성스러움의 체험을 통해서 사회적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범신론이건 기독교이건 인간은 성스러움을 추구하며 이 과정에서 자신을 떠나, 타인과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자신을 강력하게 느끼는 사회가 근대인데(개인의 탄생, 르네상스), 그 이전인 중세에는 개인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고, 대신에 개인을 떠나서 공동체 속의 존재로만 인식했다. 이 배경에 기독교라는 종교가 있었고,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성스러움의 체험과 구원의 관계가 여기에 있음. 이처럼 개인을 초월하여 더 큰 공동체 속의 일원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을 엑스타시라고 하는데, 종교적 체험으로서의 ‘성스러움’과 오늘날 다소 부정적인 느낌과 혼용되는 ‘엑스타시 ecstasy’, 즉 마약을 복용한 후에 흥분된 상태에서 도달하는 자아 초월의 상태의 의미적 기원도 여기에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시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다루어질 것이다.
-숭고란 무엇인가: 칸트의 『판단력 비판』, 리오타르의 아방가르드 예술론, 하이데거 철학
-숭고와 예술: 화가 프리드리히의 그림, 낭만주의 문학, 아방가르드 예술
-숭고와 정치: 히틀러의 전체주의적인 선동 정치
-성스러움이란 무엇인가: 성스러움의 개념의 생성과 전개
-성스러움과 예술: 바넷 뉴먼의 그림 <불의 음성>
1월 23일(화) 2교시 (16:30-18:20)
문명과 몸: 문명은 인간이 뭔가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세계, 즉 꾸며 놓은 세계를 말한다. 문화 혹은 문명을 뜻하는 영어 ‘culture’의 뜻은 ‘가공, 농경’인데, 여기에서 문명은 인간이 직접 만들어 낸 어떤 것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문명의 반대는 ‘자연’이다. 문명의 기원은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인간이 자연적인 삶을 버리고 문명의 삶을 시작한 것은 불을 사용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서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신화 속 인물 프로메테우스는 그 태초의 영웅이다. 그러나 역사학에서 문명, 문화를 이야기할 때에는 대체로 근대사회, 특히 계몽주의가 탄생했던 1750년 무렵을 가리킨다. 실제로 ‘culture’라는 단어가 사용된 시기도 17세기 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명이라는 단어가 근대와 근대 이전을 나누는 기준이 될 수 있는데, 이 두 시기는 너무나 확연한 차이가 있다. 근대를 뜻하는 ‘modern times’라는 단어는 ‘새로운 시대’를 뜻하고, 이 단어가 유럽인들에게 폭넓게 사용되는 시점은 대체로 18세기였다. 독일의 역사학자 코젤렉에 따르면, 근대의 기점은 18세기에서 찾을 수 있다. 유럽인들이 근대를 뜻하는 단어에 ‘modern’을 붙인 것은, 18세기를 전후하여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보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은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본 것인데, 그렇다면 새로움의 근거는 무엇일까? 새로움은 1800년을 전후하여 유럽에 불어닥친 혁명이었다. 근대는 사회 각 영역이 급진적인 변혁을 이루는 시기였다. 정치에서는 프랑스혁명(1789)이, 경제에서는 산업혁명(18세기 후반)이, 철학의 경우에는 데카르트에서 칸트로 이어지는 인식론의 혁명이 있었다. 특히 칸트의 『순수이성비판』(1787)은 근대적 인식론의 출발을 알린다. 세상은 인간의 시각에 의해 판단되고 인식된다는 주장은 근대 이전의 인식론과 완전히 다른 틀이었다. 이것을 철학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부르는데, 칸트가 인식과 관련하여 “우리의 경험은 우리의 인식능력의 형식에 의해 결정된다.”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시간에는 문명에 관한 위와 같은 관점에서, 문명의 시대에 인간의 몸이 어떻게 간주되는지의 문제를 중심으로 크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다룰 것이다.
-문명화의 의미: 루소의 『인간 불평등의 기원』
-영화에 나타난 문명화와 몸: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
-68운동과 몸: 유럽에서 벌어진 1968년도의 저항 운동
-예술에 나타난 문명과 몸: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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